"1965년 당시 서구미술사조가 국내에 물밀듯이 들어왔죠. 당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등 추상미술이 국내에 영향을 주면서 추상조각이 주류를 형성했는데 저는 한국의 정서와 형태를 지닌 조각을 만들겠다고 뜻을 세웠죠."
'한국 구상조각의 대표 작가' 최종태(75·전 서울대 교수)씨. 그는 동시대 주류 미술사조와 유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인물상과 종교조각에 외곬스레 매달려 왔다. 70년대 형식주의 논쟁, 80년대 민중미술,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등 화단의 주요 이슈들과 거리를 둔 채 인간의 정신적 생명의 온전한 모습을 표현하는 구상조각에 천착했다.
그는 흙, 나무, 브론즈를 이용해 소녀상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여인상 등을 주로 만들어왔다. 왜 여인상이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할까?
"어릴 적 어머니가 관절염을 앓아 친정에 자주 가셨죠.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죠. 아마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내면에 깊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소녀상은 맑고 순수한 영혼을 보는 듯해서 많이 제작했죠. 그러고보니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는 예수가 유일하네요."
그의 인체조각은 인간의 생명성과 정신성을 담은 휴머니즘적 조각이다. "중학생 때 일본어판 '레미제라블'을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3년에 걸쳐 완독하면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눈을 떴죠. 그 뒤부터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를 항상 고민했죠. 좋은 사람이 좋은 예술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선하고 온화한 인상이 그의 말에 더욱 무게를 실어줬다.
그는 서울대 미대 조각과에 진학한 뒤 종교에 심취해 불경과 성서를 탐독했다. "대학 때 불경을 통해 이성이 아닌 직관의 세계를 알았죠. 1958년 가톨릭 신자가 된 뒤 성경을 하루만에 다 읽었죠. 그런데 그 뜻이 머리와 가슴에 그대로 찍혀오더라고요. 40년 뒤 법정스님께 여쭤보았더니 스님께서 경 읽는 눈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그의 작품은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그는 "종교와 예술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라고 했다. "예술이든 종교든 처음에 들어서면 진리로 가는 정도에서 벗어나기 쉽죠. 하지만 본궤도를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다보면 중간 지점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 지점을 지나 진리의 영역에 점차 가까워지면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해 진리의 궁극으로 끌어올려주는 것 같아요."
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구도자와 같은 진중함! 예술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을 갖고, 근원을 찾아나가는 방편으로 예술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았던 그였다.
50세 되던 1982년께 그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집을 찾아왔던 소설가 강석경 씨와 예술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의식이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죠. 그리곤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엄청난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어요. 나도 모르게 그 분한테 큰절을 했고, 제가 살아왔던 삶이 필름처럼 휙 지나갔어요. 위에서는 순백에 가까운 빛이 무진장 쏟아졌고 온몸의 상태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았죠. 기쁨과 생명의 빛이 찬연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항상 기뻐요." 하늘과 숲을 표현한 수채화는 이러한 열락(悅樂)의 세계를 옮겨 놓은 것이다.
그는 최근 목조각에 원색의 아크릴을 채색하고 있다. "원초적 생명에 가까이 가려다보니 어린애가 되는 것 같아요.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기존의 틀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경지랄까요. 잘 그리기보다 재미있게 그리려 했죠."
그가 24일까지 부산공간화랑 서면점과 해운대점에서 조각전 '구도의 여정'을 펼치고 있다. 조각, 파스텔화, 수채화 등 20여 점. 051-803-4101, 051-743-6738.
기간 : 11월 25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