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경성 바람'이 거세다. 민족의 이름을 부르기는 고사하고 이름마저도 개명해야 했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혼란의 시대가 스크린에서 부활한 것. 명절을 앞두고 선보이는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코드를 벗고 엉뚱 발랄을 내세운 해방기 코믹드라마로 버무려졌다. 경성의 풍경에 살가운 리얼리티가 담겨있고, 웃음폭탄이 곳곳에 산재해 가족들과 함께 볼 만하다.
# 라듸오 데이즈-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요절복통' 생방송
△타임머신 타고 그 시절로='여기는 조선 경성방송국 제이-오-디-케이(JODK)입니다.' 단편영화로 탄탄한 기본기를 다진 하기호 감독의 충무로 데뷔작 '라듸오 데이즈'는 1930년대 조선어 라디오 방송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라디오 드라마를 소재로 한 매력적인 작품. 나라는 뺏겼지만 억압 속에서 빛난 문학과 예술로 낭만이 넘쳤던 당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다.
조선어 라디오 유학파 PD 로이드(류승범)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재즈가수 마리(김사랑). 라이브 공연이 큰 인기를 끌자 총독부는 일본을 찬양하는 드라마 제작을 지시한다. 마리에 성우 만철(오정세), 푼수기생 명월(황보라), 사환 소녀 순덕(고아성)까지 끌어들여 억지로 시작한 생방송 드라마는 대본 무시에 애드리브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
하지만 뱃고동은 기본, 개구리 울음 등 온갖 소리를 낼 줄 아는 효과맨 K(이종혁)가 독립운동을 빙자해 방송국에 위장취업하고 이어 절묘한 삼각관계에 출생의 비밀이 담긴 작가 노봉알(김뢰하)의 드라마 '사랑의 불꽃'이 전파를 타면서 이내 장안의 화제가 되는데….
영화의 코믹코드는 개성파 배우들의 엉뚱한 캐릭터에서 물씬 풍겨난다. 개구진 동시에 지적인 동그란 안경을 끼고 턱 주변까지 기른 수염에 중 가르마 앞머리로 무장(?)한 류승범. 보기만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유학파 PD로 세상만사 다 귀찮은 천하한량 역을 능글맞게 해냈다.
끊임없는 돌발 애드리브로 방송사고 전문 재즈가수 역을 맡은 김사랑과 한복을 곱게 입고 마이크 앞에서 큰 절을 하는 등 오버액션도 서슴지 않는 푼수 기생 명월 역을 맡은 황보라의 감칠맛나는 연기도 시종 눈길을 끈다. 캐릭터에 집중하다보니 영화적 감동이 적고 코믹 코드가 다소 늘어지는 흠도 엿보이지만 든든한 소재와 빼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이를 살포시 덮어준다.
# 원스 어폰 어 타임-전설의 보물 동방의 빛 둘러싼 '코믹 대결'
△비틀어본 암흑기='가문의 위기' '가문의 부활' 등 '가문'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정용기 감독의 신작 '원스 어폰 어 타임'도 시대적 배경은 해방전야. 석굴암 본존불상의 미간에 박혀 있었다는 전설의 보물 '동방의 빛'을 둘러싼 일본 군부와 경성 최고 사기꾼들간의 대결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낸다.
전설의 보물 '동방의 빛'을 찾아내자 이를 일본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은 일본 군부의 최고 실력자 총감(김응수)은 성대한 환송회를 개최한다. 한편 전도유망한 재력가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천의 얼굴을 가진 경성 최고의 사기꾼 봉구(박용우)는 '동방의 빛'을 차지하기 위해 '내숭 100단'의 경성 제일 재즈가수 춘자(이보영)에게 환송회에 동행하자며 유혹한다.
그러나 낮에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섹시한 클럽 가수로 일하고 있지만 밤에는 경성 제일의 도둑 '해당화'로 변신하는 춘자 역시 '동방의 빛'을 훔치려는 꿈을 갖고 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봉구와 춘자는 서로 다른 꿍꿍이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야심찬 작전을 전개하는데….
영화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와는 달리 의외로 코믹 코드가 강하다. 매력적인 외모와 고단수 화술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경성 최고의 사기꾼으로 변신한 박용우는 때론 미끈하게, 때론 능글맞은 연기로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다소 카리스마는 약하지만 섹시한 클럽 가수 역을 맡은 이보영도 재기발랄하고 활기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고 코믹 코드를 주도하는 성동일과 조희봉의 연기도 조미료 역할을 이상으로 박수갈채를 받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어쩌면 심각할 수 있는 소재를 코믹 터치로 풀어낸 정용기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연 : 류승범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