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생문화재단 제1회 역사문화기행 자료집
◆ 겁외사(劫外寺 : 성철스님 생가)
겁외사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스님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단순한 생가복원 차원을 넘어서 성철스님 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하기로 하여 2001년 3년 30일 탄생 90주년과 열반 8주기를 맞아 3년 만에 생가 및 겁외사 9동의 건축물로 건립하였다.
성철 스님의 부친인 이상언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자했던 성철 스님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오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 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배움의 휴식 터 산청 남사 예담촌
경북하면 안동하회 마을이요,
경남하면 산청남사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 또한 전통한옥마을로 유명합니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 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 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습니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 입니다. 농촌 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휴식 터로 자리 하고자 합니다.
한옥풍경이 어우러진 전통문화 배움터 남사 예담촌에 오셔서 배움이 있는 휴식을 충전해가시기 바랍니다.
남사예담촌장 하 만 근
지리산 들머리의 이 작은 마을은 전통한옥이 잘 보존돼 있어 해묵은 담장을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선 느낌을 받는다. 이 예담촌의 상징은 X자형 회화나무다. 안동 도산서원에도 있는 이 나무는 일명 선비나무로 불리는데 예담촌이 사대부 선비마을임을 보여준다.
이 회화나무를 지나면 200년 전에 지은 이씨 고가가 나타난다. 사랑채 익랑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로 배치됐고, 왼편으로 사당이 있는데 한옥 특유의 맛이 묻어난다. 최씨 고가는 현재 주인인 최재기씨의 아버지대에서 분가해 1920년대에 지은 한옥이다. 뒷간은 여느 화장실과 달리 2층으로 설계돼 효과적인 인분 사용을 고려한 건물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도 사양정사 이동서당 초포정사 망추정 등 선비들의 생활공간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민속촌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단순한 견학에서 벗어나 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 한옥에서의 민박을 비롯해 염색, 떡방앗간에서 떡빚기, 서당 체험 등 우리 고유의 먹을거리와 농사 체험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예담촌은 산청군의 적극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정작 방문해 보면 제대로 된 안내판이 없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어 어디부터 둘러봐야 할지 막연해진다. 한옥에 불쑥 들어갈라치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많아 당황하게 된다. 이곳 주민들이 안내를 하기 때문에 예약 위주로 운영된다. 주민들로서는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돈 되는 일’도 아니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개인적으로 견학을 요청하면 푸대접받기 일쑤다. 산청군 농업기술센터가 추진한 이 사업이 제대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려면 좀 더 세심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청계를 가운데 두고 남사는 진주에, 상사는 단성에 속하였는데 그때 두 마을의 명칭이 같은 사월리였다고 합니다. 1906년에 와서 진주의 사월면이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남사도 단성군 사월면으로 산청에 속하게 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단성군이 단성면으로 격하되어 산청군에 통합될 때 두 마을은 단성면에 속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습니다.
남사마을에서는 수많은 선비들이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여 많은 수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은 빛내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합니다. 그 이름의 변용은 사양정사, 니사재, 이동서당 등의 서재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왕봉에서 100여리를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가 니구산인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입니다. 마을은 당산이 숫룡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가 되어 서로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인 쌍룡교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반달모양의 마을 터를 배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의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도 않고 우물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고 합니다.
◆‘단구성(丹丘城)’을 아시나요?
80년대 후반의 한 해 여름철이었다. 5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지리산 종주산행을 하다 엄청난 호우를 만났다.
첫날 화엄사를 출발, 간신히 뱀사골산장에 도착했다. 호우 속 산행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다음날 10여명이 종주를 포기하고 토끼봉에서 칠불암으로 탈출했다.
천왕봉까지 계속 나아간 대원들도 길을 돌아서야 했다. 폭우에 단성교(丹城橋)가 떠내려간 때문이었다.
대원사도 중산리도 길이 끊겨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백무동으로 하산해야 했다.
단성교는 경호강에 걸려 있는 다리로 교통요충지 원지(院旨)와 단성을 이어주는 교량이다. 호우로 경호강이 범람, 시멘트의 육중한 다리가 그대로 급류에 떠내려 가버린 것이다.
단성교가 유실되자 동부 지리산권 도로도 함께 끊어졌다. 중산리도, 대원사도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이 원지의 단성교는 지리산의 첫번째 관문(關門)이었다. 남명 선생이 덕산에 들며 명명했던 자연석문 ‘입덕문(入德門)’이 지리산의 현관문이라면, 단성교는 그 앞의 대문 격이다.
진주에서 자동차를 타고 들면 가장 먼저 ‘지리산’이라고 큰 글씨로 맞아주는 곳이 이 단성교이다.
단성교가 있는 원지는 지난날 신안나루로 그 이름이 높았다. 사통팔달의 육로는 물론, 물길까지 열려 있어 원지를 지나지 않고는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전~통영 고속도로 단성 나들목이 단성 쪽에 자리하고, 원지를 통과하던 국도마저 적벽산을 바로 지나가는 4차선으로 바뀌었다. 신안나루, 단성교, 원지마을의 전통과 명성이 퇴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른바 ‘지리산권’으로 일컫는 지리산의 동부 경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호강(鏡湖江)이다.
만수천, 임천, 엄천강으로 이름이 바뀌며 흘러온 지리산 물줄기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화림계곡 물줄기와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만나면서 경호강이 된다.
강정에서 시작한 경호강은 산청읍과 단성을 지나 진양호까지 80리에 걸쳐 흘러내리면서 선비의 고향답게 곳곳에 정자문화를 일구어 놓았다.
이 경호강이 동부 지리산권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경호강이란 ‘거울같이 맑은 호수’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변의 자연 경관이 빼어난 것은 물론이요, 산자락을 맞아 강이 굽이를 도는 곳마다 정자(亭子)가 있고, 선비들의 고고한 풍류와 싯귀들이 남아있다.
특히 단성교가 자리한 원지는 적벽산과 엄혜산이 경호강과 어울려 선경을 이룬다.
이곳을 찾았던 한 고을 수령은 달밤의 흥취에 취해 뱃놀이를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만 관인(官印)을 강에 빠뜨려 파직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지리산을 찾는 이들이 그 첫번째 관문인 경호강 단성교를 무심코 지나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리산에 첫발을 들여놓는 단성을 그냥 통과하고 지리산을 다녀왔노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남의 집 뜨락은 무시한 채 사랑방을 들락거리는 것과 같다.
단성은 신라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궐성(闕城), 강성(江城), 진성(珍城), 귀성(龜城), 단계(丹溪), 단성 등 강과 성과 단사(丹沙)의 단과 관련시킨 이름을 써서 아름다운 수향을 상징해 왔다.
‘산음(山陰)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단성에 이르렀다.
지나온 곳마다 시내와 산이 맑고 빼어나고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의 남은 운치이다. 배로 신안나루를 건너 단성에 들어갔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김일손은 ‘속두류록’(1489년)에서 단성을 단구성으로 일컬었다. 단구성이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낮없이 밝다고 한다. 단성이 시성(詩聖) 이백(李白)이 노래한 그 단구성과 같다고 했다.
지리산 자락의 이 단성 땅은 김일손이 단구성으로 불렀을 만큼 신선 세상과 같다.
하지만 신선세계의 여유자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산의 맥박과 지리산의 정신을 잉태시킨 고장이다.
천하의 인물을 배출했는가 하면, 민초들의 기막힌 항쟁사도 간직하고 있다.
(2002년 1월4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문익점의 면화 시배지 바로 맞은편으로 2차선 도로가 높다란 둑과 함께 새로 열려 있다. 그 도로를 따라 불과 1킬로미터 거리에 단성 땅의 또 하나 명소가 있다.
곧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저 유명한 성철(性徹) 종정 생가이다. 경호강 물줄기가 감돌아 흐르는 단성면 묵곡리이다.
관청 등에서 근년에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생가뿐만 아니라 성철 기념관과 사찰까지 함께 세웠다.
성철 생가를 찾아가면 솔직히 어리둥절한 기분이 앞선다. 한 스님의 생가라기보다 무슨 궁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통한옥 고대광실이 여간 번쩍거리는 게 아니다. 강릉의 오죽헌, 강진의 영랑 생가를 찾았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정도로 좋은 집이면 굳이 출가하여 산문에 들 이유가 없을 법하다. 하기는 석가모니는 일국의 왕자였지만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출가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복원이란 원래 모습대로 재현해 놓는 것이다. 그래야 주인공이 거기서 어떻게 자랐고 무슨 생각들을 엮고 했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담장도 옛날 그대로, 이웃집도 그대로 두고, 고샅도 원래 모습대로 있어야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성철 생가는 어떤가. 주변 일대를 밀어붙이고 도로와 시설물이 들어섰다.
단성초등학교와 진주공립중학을 다녔던 소년 이영주(李英柱, 성철의 속명) 모습을 연상하기도 어렵다.
지리산 둘레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 혈세로 소설 속의 ‘최참판댁’ 집을 짓지 않나, ‘玉女(옥녀)’라 새긴 돌이 나왔다며 성춘향 묘소로 성역화를 하지 않나, 숲속에 빨치산 마네킹을 세우지 않나, 옛날 장터를 복원한다며 시멘트 광장을 만들지 않나... 참으로 한심한 일이 한 둘이 아니다.
성철 종정의 생가는 당연히 복원해야 하지만, 왜 이런 식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따른다.
하지만 성철 생가를 찾아 그런 문제를 따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현대의 고승 성철 종정이라면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들이 좋아하는 지리산 들머리에서 그이의 생가를 찾을 수 있고, 차분한 마음으로 그이를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것만도 뜻깊은 시간일 수 있다.
성철은 지리산과 먼저 인연을 맺었다. 처자가 있는 몸으로 지리산 대원사 탑전에 자리를 깔고 참수행을 시작했다.
처자를 거느린 속인이 절집의 룰을 깨뜨리고 탑전에서 기도를 하자 실랑이가 벌어졌다. 절에서 아무리 쫓아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고 있던 동산(東山)스님(범어사를 일으킨 현대 고승)이 그를 불러오게 하여 “중이 되어라”고 권했다. 성철이란 법명도 동산스님이 지어주었다.
그렇게 머리를 깎은 성철은 “우습게 중이 됐어”라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1935년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성철은 입산 과정이 그렇듯 가족 관계도 남다른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그가 금강산으로 가자 어머니가 그곳까지 쫓아왔다. 그는 속세와의 단절을 위해 산 위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돌을 던졌다.
불가에 아들을 뺏기자 그의 아버지는 석가모니에 복수를 하겠다며 앞강에 그물을 쳐놓고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그 아버지는 20여년이 지난 뒤 아들을 만나고 나서야 강의 그물을 끊었다는 것이다.
“딱 한 말씀만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신도에게 “중한테 속지 말어!”라고 했다는 성철, 그의 가족사 또한 특별하다.
출가한 아버지를 원망하다 도리어 아버지의 길을 따라간 “필요하지 않은 딸” 불필(不必), 세속에 연연할 인연이 없어져 한숨 속에 지내다 절에 들어와 휴식을 얻은 부인 일휴(一休) 또한 그렇다. 8년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장좌불, 스님은 3000배 절을 올려야 만나주는 등 숱한 일화가 있다.
무엇보다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1981년 조계종 6대 종정 취임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다.
뜻을 알거나 모르거나 이 말은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것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사회대중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원문이다.
보고 듣는 것밖에 진리가 없으니 정신이 흐리면 무엇 하나인들 깨달을 수 있겠는가.
1993년 성철 종정은 열반했다.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어서 푸른 산에 걸렸다”는 열반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이를 가리켜 “현대의 마지막 선승”이라고들 한다.
그이가 지리산 들목의 생가 복원과 함께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지리산을 찾는 우리들이야말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기에!
(2002년 1월17일)
◆지리산에도 문(門)이 있다오
“가장 넘기 어려운 산은 문턱이다”는 영국의 속담이 있습니다.
문(門)이란 사람이나 동물이 안팎을 드나들거나 통할 수 있도록 틔워놓은 곳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이 문이 갖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문 앞에 남녀 두 사람의 신발이 놓여 있다면,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는 방에 들어가지 말고, 말이 없으면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이 세상에는 문이 많습니다.
전통 가옥에는 대문 중문 협문 정문 후문 측문이 있는가 하면, 능(陵)과 사찰과 관아 등의 홍살문 홍예문 옹성문 일각문 금강문 등등 셀 수 없이 많지요.
그렇다면 산(山)에도 문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지리산에는 엄연히 그 문이 존재합니다.
주봉 천왕봉에는 서쪽에 통천문(通天門)을, 남쪽에 개천문(開天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천문은 예부터 부정(不貞)한 자는 드나들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시인 고은(高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은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는 오르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통천문은 서문, 개천문(또는 개선문)은 동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남부능선의 석문, 쌍계사 앞의 쌍계석문이 있고, 청학동 들목에도 전설적인 석문이 있다지요.
하지만 위의 문들은 천왕봉이나 관념상의 청학동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첫 관문은 그보다 훨씬 먼저 만나게 됩니다.
주봉 천왕봉으로 오르는 동부의 관문은 시천(矢川), 곧 덕산(德山)입니다. 지난 1960년대까지는 시외버스가 이곳까지만 운행했었지요.
천왕봉이 정면으로 빤히 올려다 보이는 덕산, 바로 여기서부터 배낭을 메고 걸어가야만 했답니다.
이 덕산으로 찾아드는 길목에 ‘입덕문(入德門)’이 있습니다.
지금의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덕천강 벼랑을 따라 아슬아슬 감돌아드는 곳에 큰 자연석문(自然石門)이 있었어요.
1561년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이 회갑 나이에 이 덕산으로 찾아듭니다. 그이는 이 석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덕천강으로 내려가 갓끈을 씻었습니다.
그런 뒤 자연석문을 ‘입덕문’이라 명명했답니다.
그이는 어째서 갓끈을 씻고, 입덕문이라고 명명한 것이었을까요?
입덕(入德)이란 덕산, 곧 지리산에 든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러니가 그이는 지리산 대문 앞에서 갓끈을 씻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입니다.
남의 집에 들 때도 문 앞에서 헛기침을 하고 반응을 기다려야 하거늘, 하물며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에 어찌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원래의 자연석문 대신 도로변에 ‘入德門’을 알려주는 각자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명 선생이 갓끈을 씻었던 ‘탁영대(濯纓臺)’와 소요음영한 ‘덕암(德岩)’은 그대로 남아있어요,
1960년 남명 후학들이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勝契)’를 닦아 82년 6월 22일 입덕문 각자를 옮겨세웠다는 내용의 ‘입덕문기’ 비석도 함께 서 있습니다.
지리산의 대문이 자리할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지요.
덕산 2㎞ 못 미친 곳에 주유소를 겸한 넓직한 광장을 가진 휴게소가 있지요. 이곳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5분 정도 걸어가면 입덕문과 탁영대와 덕암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이 ‘지리산의 문’ 앞에서 옷깃을 여미거나 남명의 자취를 찾아보는 이를 아직은 만나보지를 못 했습니다.
그냥 자동차를 타고 쌩쌩 빠르게 지나치기만 합니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그냥 통과입니다.
우리는 화장실의 문도 노크를 한 뒤 대답을 기다립니다.
방문 앞에 남녀 두 사람의 신발이 놓여 있다면,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는 방에 들지 말고, 말이 없으면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 경배해온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의 대문을 버릇없이 드나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지리산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외경의 대상입니다.
(2001년 12월13일)
◆남명기념관에 가면…
(1)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 조식/ 두류산 양단수>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는 덕천서원 앞 세심정 앞에서 두 계곡이 합류되는 곳을 가리킵니다.
중산리계곡에서 흘러온 신천(新川) 물과 대원사계곡과 장당계곡이 합한 삼장천(三壯川)이 여기서 한데 모여 덕천강(德川江)으로 바뀌어 흐르게 되지요.
두 끝의 물이 모인다고 하여 양단(兩端)이라 이름하고, 또 두 시내가 큰 못(潭)을 이루면서 한 줄기로 합해지니 양당(兩塘)이라고도 일컫습니다.
그래서 ‘두류산 양단수’라 하고, 때로는 ‘두류산 양당수’라 부르기도 합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