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치 이야기>
잃어버린 정령의 얼굴
[1]
서북능선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에 위치한 정령치는 달궁에 피란도성(避亂都城)을 열었던 마한(馬韓) 한 왕조의 정(鄭)장군이 쌓았던 수비성터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그렇게 씌어 있다.
지금은 성삼재 횡단도로와 함께 남원 구룡계곡과 달궁, 또는 성삼재를 잇는 2차선 관광도로가 뚫려 있다.
정령치는 지리산 반야봉과 주능선을 조망하기에 좋아 차량으로 오른 이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지리산 구경 하기를 즐긴다. 정령치는 지리산 조망의 한 전망대로서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는 '정령치'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漢)나라 소제(昭帝) 3년(BC 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 달궁으로 들어와 도성을 열고 수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하였다. 도성이 완성된 뒤 고개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달궁을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보고 옛 역사를 추적해온 이가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김경렬님이다.
그이는 달궁을 자주 찾아가 노인들을 만나 옛날부터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1928년 7월, 심원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달궁마을을 덮었다. 마을 앞 정자나무 위쪽에서 농가 세 채가 떠내려가고 논밭이 유실돼 피해가 컸다. 다음날 사람들은 200미터 아래의 왕궁터에서 냇물에 휩쓸려 패인 왕궁터를 보고 모두 놀랐다. 거기서 나온 다섯 아름의 귀목나무 그루터기와 새까맣게 변한 감나무는 둘레가 네 아름이 넘는데 썩지 않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다량의 동경(銅鏡)과 숟가락 등 청동제 유물들이었다.
"직경 1.5미터 정도의 질그릇 시루 한 개, 수십 개의 질그릇과 접시, 형태만 남은 매우 커보이는 숟가락 수십 개, 동경 두 개, 활촉같은 쇠붙이가 땅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완전한 것은 질그릇 접시 몇개 뿐이고, 쇠붙이는 녹이 슬고 삭아 있었다. 그 때 접시 등 완전한 것은 산내 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이 가지고 갔다."
김경렬님은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와 주민들의 입으로 전래되는 얘기들을 취합한 끝에 달궁에 마한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월궁, 月宮)'이 있었고, 이것이 지리산 개산의 역사라고 단정했다.
달궁에 대한 김경렬님의 역사 추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7년 11월6일 그이는 달궁마을 김수곤 이장 부부와 함께 은장골을 따라 정령치로 오른다. 더 정확하게는 달궁마을에서 정령치 동쪽 고리봉(1304.5미터)으로 직등한 것이다.
은장골은 여순반군의 저 유명한 김지회(金智會)와 그의 처 조경순(趙庚順)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숨어있다 잡힌 곳이다.
7순 나이의 그이는 험한 골짜기의 잡목숲을 헤치고 네 시간을 땀을 쏟은 끝에 고리봉 능선 바로 아래 다다랐다.
그이는 어째서 이런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김경렬님은 정령치와 가까운 곳에 마애조각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한시대 피난도성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이는 마을 이장을 졸라 힘든 산행을 자청한 것이다.
그이는 마침내 그 조각상 앞에 섰다.
'조각상은 둥글넓적한 얼굴, 두툼한 입술, 알맞게 큰 기, 펑퍼짐하면서 우뚝한 주먹코로 하여 얼굴의 전체 윤곽이 선명한 데다 작달막한 키에 아래로 흘러내린 선이 굵은 의상이 또한 외모의 짜임새를 돕고 있었다...(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과 체격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자화상(自畵像) 그대로이다.'
"이 조각상 아래에는 연대가 훨씬 내려와서 조각된 것으로 짐작되는 선이 가늘고 세련되지 못한, 앉은 자세의 불상도 있고, 서투른 솜씨로 집을 그린 조각도 있다. 조각상은 아마도 열 곳이 더 넘을 것 같다....(중략) 마애석상의 표정에서는 석가불의 초연함, 자비로움, 지혜로움, 후덕함, 또한 천년을 변치 않은 은은한 미소도 느낄 수 없다. 여기서는 오로지 인고와 의지, 어떤 통한(痛恨)의 비장감이 서려 있을 뿐이다. 다 떨어져 나가고 의지로 달려 있는 우람한 주먹코를 쳐다보면 차라리 처절감이 들 뿐이다."
김경렬님은 정령치 마애석상 주인공을 '마한의 얼굴'로 보았다.
그이는 달궁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종근씨(당시 83세)로부터 "이 조각상이 정장군과 황장군의 석상이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그이는 나머지 불상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단정했다.
필자는 김경렬님을 따라 달궁마을을 곧잘 찾았다.
그러다 그이는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지리산 개산 역사에 대한 비밀(?)을 추적하던 그이의 집념이 나에게 큰 부담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정령의 그 마애석상을 이번 답사길에 처음으로 찾게 됐다. 그런데...!
[2]
‘지리산 사랑을 위하여' 답사팀과 함께 달궁~심원계곡에 콸콸 쏟아져내리는 물길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10여년 전 심원마을에 들러 청정계류를 지켜보며 정령치 마애석상군에 대한 열변을 토하던 김경렬님이 문득 떠올랐다.
"정령치로 가야겠습니다" 그러자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정말 뜻밖에도 "마애석상군도 볼 텐가?"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곳을 알고 계세요?" "그럼요!"
아, 그 순간의 기쁨이란! 정령치로 수없이 넘나들면서 '정령의 얼굴'을 찾아보지 못한 자신이 이 때처럼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정령치에 닿고보니 이게 또 웬일이겠는가? 전에 보지 못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란 안내표지판이 내걸려 있었다.
마애불상이라니?
달궁의 노인이 마한 때 조각한 '정장군, 황장군의 조각상'이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때라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령의 얼굴'을 보러 간다는 엄청난 기대와 유혹에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불상이란다. 그것도 개령암지 불상군이라고 하니, 이 정령치에는 개령암이란 암자가 있었고, 그 터에다 새긴 불상군이란 뜻이다.
정령치 마애석상군을 찾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곳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선입감 때문이었다.
김경렬님은 달궁마을에서 은장골을 거쳐 네시간이나 걸어오른 끝에 어렵게 현장에 닿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정령치에서 고리봉을 향해 능선길을 채 2, 3분도 걷지 않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500미터'란 안내표지가 있고, 거기서부터 길 양편에 흰 줄을 매달아 놓았다.
혹시라도 길을 벗어날까봐 목책 대신 안내 와이어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아주 편편한 길에 어린아이라도 찾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너무 수월하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애석상군 앞에 닿았다.
마애석상 조각을 확인하기에 앞서 '보물 제1123호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란 안내현판을 먼저 만났다. 돋을새김한 불상 12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위치도도 만들어 놓았다.
'가장 큰 불상은 4미터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타원형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정령의 얼굴', 정장군, 황장군의 얼굴이 아닌, 그것도 고려 불상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정말 불상일까요?"
나는 김경렬님이 '정령의 얼굴'에 감격하고 흥분하던 모습을 지을 수가 없어 과연 불상인가 하고 의문부터 던져보았다.
"국가 지정 보물이니 불상이 아니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네요."
동행한 솔메거사가 이마에 돋을 새김한 것을 가리키며 불상이 맞다고 했다.
그렇다. 지난 92년 1월15일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되기까지 문화재 전문가들이 면밀하게 분석했을 것이다.
'불상 아래 明月智佛(명월지불)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하다'고 현판에 씌어 있다.
달궁마을 정종근 할아버지가 김경렬님에게 정령과 황령 수비성을 쌓은 '정장군'과 '황장군'의 얼굴이라고 말한 두 석상만이 4미터의 크기로 크게 돋을새김을 해놓았다. 나머지 조각들은 1~2미터의 작은 것들로 김경렬님은 후대에 조각한 불상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보물 지정 안내 간판에는 '작은 불상 역시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여 큰 불상과 동시에 조각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니까 저 까마득한 마한 왕조의 달궁 피난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김경렬님은 1978년에 작고한 달궁마을 양계원(85세)씨가 60년 전에 황포수를 따라갔던 얘기도 들려주었다.
양씨는 몰이꾼으로 함께 갔는데, 덕두산에서 몰이를 하며 마한 장군상(마애조각상) 근처에 이르렀다. 마침 새끼 일곱 마리를 거느린 어미 멧돼지를 발견했는데, 어쩐 셈인지 황포수가 그토록 찾았던 멧돼지를 보고도 총구를 겨누지 않더라고 한다. 멧돼지를 잡을 생각은 고사하고 몰이꾼들에게 서둘러 하산하자고 하지 않겠는가.
"여긴 마한 임금님의 성지(聖地)니까 말여, 그냥 내려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지정 보물 1123호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란 현판 앞에서 '마한의 얼굴'도 '정령의 얼굴'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 된 일일까?
마애불상군 12구가 자리한 거대한 암벽이 형편없이 쪼개지고 무너지고 하여 4미터의 큰 불상 한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그 형태조차 희미하여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정령의 '정장군'이 화를 내어 자신의 조각상 하나만 남겨놓고 모조리 쫓아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김경렬님이 촬영한 사진에는 완벽한 모습이었는데, 보물 지정 이후 이 모양이 됐다.
[3]
정령의 마애조각상을 찾은 김경렬님은 그 얼굴에 인고와 통한의 비장감이 담겨 있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그대로다!"고 감탄했다.
"마애조각상이 풍기는 뉘앙스는 어쩌면 혹독한 일제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온갖 핍박과 수모를 견디고, 8.15 이후의 혼란기를 겪고, 6.25 전쟁을 슬프게 치르고, 독재자들의 횡포에 늘 밟히고 한, 우리 현대사를 자신의 얼굴에 새기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이는 장군상과 작은 불상들을 구분하여 보았던 것이다.
정령의 불상을 정장군, 또는 황장군의 장군상으로 보고, 그 얼굴은 인고와 통한의 비장감이 서린 우리의 자화상과 같다고 생각한 것은 어째서일까?
김경렬님은 달궁의 '마한 피란도성'에 집착해 있었고, 그 때문에 정령의 역사 기록의 편린들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정령에는 정유재란 때까지 정령성(鄭嶺城)이 남아있었다. 정유재란 때 구례에 이어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과 운봉 사람들은 정령성으로 피란했다. 조선 선조 30년(1597년) 음력 8월16일 남원성 함락 하루 앞날 정령성 상황은 어땠을까?
'...외로운 성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위급하다.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밤의 불빛이 낮같이 밝았다. 우리들은 가족 수백명과 함께 바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 밤을 황령암에서 지냈다.'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기록한 글이다. 그의 음력 9월6일 기록을 보자.
'...왕래하는 왜적이 끊이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렸다. 식량이 바닥났으니 어쩔 수 없이 은신암으로 되돌아왔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왜병의 형세가 약간 줄어들어 있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지리산 사람들이 정령성으로 피란가던 얘기며, 다시 지리산속 암자들을 전전하는 과정의 눈물겨운 얘기들을 쓰고 있다.
'늙은이와 아이들은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걸어서 겨우 정령성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 아침에 서운암터에 내려가 숨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거기까지 올라왔던 왜병이 모두 내려갔다. 월운령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에 처음으로 한 동네 사람을 만났다. 우리 마을에 죽은 사람이 100여명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대로 모두 버렸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남원과 운봉 사람들이 정령성과 지리산속 암자로 도망다닌 얘기가 눈물겹다.
유람이나 등산으로 정령까지 오르는 것도 힘드는데, 왜병들에 쫓기면서 피란 보퉁이를 메고 험준한 정령으로 올랐을 당시 지리산 사람들의 처절한 아픔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피란은 기원 전인 마한시대부터 시작됐지만, 운봉 여원치와 함양 팔령치 사이를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 왔다갔다 할 때, 고려말 아지발도의 왜구가 운봉을 점령했을 때, 그리고 정유재란과 6.25 등등 고난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됐다.
김경렬님이 정령의 마애조각상을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마애석상군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으로 확인, 보물 제1123호로 지정했다.
마애조각상은 마한 피란도성의 정장군도, 황장군도 아니고,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명월지불(明月智佛), 곧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이이라고 하였다.
정령의 안내판에도 마애석상군으로 접근하는 오솔길 바로 직전의 평퍼짐한 곳을 '개령암지'로 그려놓았다.
부처님이라면 인고와 통한의 우리들 자화상일 수는 없다.
마애불상군에서 발길을 돌리는데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그 아래 숲속으로 우리 일행을 이끌고 들어갔다.
"무속인들이 이곳에 베트콩 아지트같이 땅굴을 파고 숨어지내며 기도를 한다."
그들의 그 땅굴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정령치의 베트콩?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동안 잣나무 숲속을 살피고 다녔지만, 문제의 땅굴 아지트는 찾지 못했다. 관리공단 직원들이 쫓아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땅굴 대신 둥글레가 밭을 이루다시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우리들이 정녕 찬탄을 금치 못한 것은 야생화들이 온통 정령 일대 능선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서북능선 북단의 바래봉 철쭉만 아름다운 화원은 아니었다. 정령 일원의 야생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리산 닷컴'의 김서곤님은 야생화들을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에 담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날 수백 컷의 지리산 야생화들을 담았을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전쟁과 피란의 비극이 점철된 곳, 하지만 지금은 그 아픔 대신 갖가지 야생화들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고 있다. 세월 무상인가.
* 참고자료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